작성일 : 16-01-06 07:18
소방의 역사
 글쓴이 : 장군
조회 : 563  
삼국시대
삼국간 잦은 전란으로 사람들은 대부분 도성이나 읍성에 거주하는 것이 보통 이었으며 이러한 성()은 대개 구릉지에 축조되었고, 도성의 건축술이 발달되어 왕궁,관청,도성등 대형건축물이 축조되고 일반인들의 민가는 서로 인접하여 짓게 되어 화재발생시 연소가 용이하여 대형화재로 발전, 화재가 사회적 재앙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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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기록
신라시대 미추왕(이사금) 원년(서기 262), 금성 서문에 화재발생 민가 1백 여채 연소
진평왕 17(서기 596), 영흥사에 불이나 왕이 친히 이재민을 위로하고 구제하였다는 기록
민가가 밀접한 도성 내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화재를 사회적 재앙으로 인식하여 국가에서 구휼 대책 마련
 
 
이 시대에 화재가 발생하게 되면 도성에서는 대개 군사들과 성민들이 합세하여 불을 진화하였고 지방에서는 부족적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에 부락 단위로 소방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삼국시대는 신라에 의해 통일이 되고 전쟁은 사라졌으며 평화의 시기로 접어들면서 산업이 발달하고 인구증가가 가속화되었으며 도성내에는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도시가 번창하고 시가지의 민가가 밀집함에 따라 화재가 자주 발생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한 주민들의 방화의식도 싹텄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기록
 
헌강왕 6(서기 880) 9월에 왕이 좌우 군신과 월상루에 올라서 사방을 관망하였는데 가옥이 줄지어 늘어섰고 가악이 그치지 아니하므로 왕이 가신에게 말하기를 내 듣건데 작금에 백성이 집을 기와로 덮고 밥을 짓는데 숯을 쓰는데 사실이 그런가라고 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으로 추측하건대 사회가 안정되고 경주가 번창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화재예방 측면에서 볼 때 민가의 지붕을 초옥()으로 하지 않고 기와로 하였고 나무를 때지 않고 숯을 써서 밥을 지었다 함은 백성들의 화재에 대한 방화의식에서 기인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와서 국가차원에서 소방에 관한 제도가 마련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의 정부 조직처럼 화재를 담당하는 전문조직은 없었으나 금화제도라는 명칭으로 화기를 단속하고 예방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보다 화재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인구가 증가되고 대형 건물이 들어선 데다가 병란이 잦은데 그 원인이 있었다.
더욱이 도읍지였던 개경은 지역이 협소하여 건물들이 밀집하였고, 민가의 경우 초옥이 대부분 이어서 한번 화재가 발생하게 되면 민가 및 상가로 확대되어 수 백동씩 연소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이 시대에서는 왜구의 방화 약탈이 심하여 각 궁전과 창고의 대형화재가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소방조직과 제도 등장
금화관리자 (禁火管理者)의 배치
각 관아(官衙)와 진()은 당직자 또는 그 장()이 금화 책임자였으며 문종(文宗) 20년 운여창(양곡 창고)화재 이후로 창름(쌀창고), 부지(창고)에 금화관리자를 배치하고, 어사대가 수시 점검하여 일직이 자리를 비우거나 빠지는 경우에는 먼저 가둔 후 보고하였다.
 
실화 및 방화자에 대한 처벌
범인이 관리인 경우에는 현행 면직처분에 해당하는 현임삭탈을 하였고, 일반인이 실수로 관청을 소실하였을 때는 태 50, 민가 및 재물을 불에 태운 경우에는 장 80의 형이 주어졌으며, 일반인이 관청, 사당 및 민가의 재물에 일부러 불을 지른 자는 건물의 크기나 재물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징역 3년형을 주었다. 또한 민가나 양곡, 피륙을 저장한 곳에 불을 지른 자는 주범은 사형, 종범은 곤장 20대의 형벌을 가하였다.
 
 
건축 및 시설개선
주택구조 :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개선토록 권장하고 길을 따라 와옥(기와집)을 짓도록 하여 화재발생에 따른 연소확대를 막을 수 일는 구조를 정책적으로 고려하였다.
창고시설 : 화재를 대비하여 지하창고 설치하였는데 큰 창고의 경우 20만석 이상도 저장할 수 있었다.
 
화통도감 : 화학제조 및 사용량이 늘어남에 따라 직제를 신설하여 특별관리하였음.
 
근세시대
 
조선전기
조선시대에는 서울인 한성부를 비롯한 평양부, 함흥부 등 도시들이 발달하고 수공업의 급속한 성장과 상업도시로 발달함에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하였으며, 병란 및 민란 등으로 궁궐화재도 극심하였다.
이 시대부터 소방 고유조직이 탄생되었는데 특히 세종대왕 때에는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하고 금화군을 편성하여 화재를 방비하는 등 새로운 소방제도가 생겼으나 연산군 이후부터 철종조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화재가 많이 발생하였음에도 계속되는 당쟁과 전쟁 때문인지 소방제도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가 없다.
 
소방조직과 제도
 
금화법령
소방관련 법령은 경국대전의 편찬으로 그 골격을 갖추었는데 행순(순찰), 방화관계법령, 실화 및 방화에 관한 형률이 기록되어 있다.
1) 행순(순찰근무) : 궁성내에서는 야간시간을 배분하여 행순하고 이상유무를 직접 왕에게 보고하고, 도성내에서는 오후 10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4시까지 통행을 금지하였으며, 4대문 밖에서는 병조(兵曹)에서 당직자 6명을 배정하여 순찰하게 하였다.
2) 실화 및 방화자에 대한 처벌 : 실수로 자기집을 불태운자는 장40, 관가나 타인의 민가를 태운자는 장50, 그로인해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자는 장100대의 형을 주었고, 일부러 불을 질러 자기집을 태운자는 장100, 불을 질러 관청이나 타인의 집를 태운 자는 장100대에 2년간 추방형을 주었으며, 관리가 순행할때 실화한 사람을 만나면 바로 잡아 두고, 불을 끈 뒤에 조사하고, 실화자가 노약자·발병자·임산부일 때는 벌금형을 주었다.
3) 포상 및 사면제도 : 범인을 체포하는 사람에게는 범인의 가산으로 상을 주고, 불지르는 자를 잡아 고발하는자 중에서 양인은 계급을 초월하여 관직을 주고, 천민은 양인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고 모두 면포 2백필을 상으로 주었으며, 또한 불을 지른 자 중에서 자수하는 자에게는 죄를 사하여 주고 면포 2백필을 주었으며, 대신에 체포한 화적은 반란에 준하여 극형에 처하였다.
 
 
금화관서의 설치
세종 8(1426) 2월 한성부 대형화재를 계기로 금화관서를 설치하게 되었는데 상비 소방제도로서의 관서는 아니지만 화재를 방비하는 독자적 기구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소방기구라 볼 수 있으며 이후 수성금화도감 등으로 변천하였다.
 
 
금화도감의 한성부 합속
세조 6(1460) 금화도감을 폐지하고 관원수를 감하는 관제의 개편이 있었는데 이때 금화도감을 한성부에 속하는 기구로 하였다. 이후 한성부에서 어떠한 기구 형태로 운영되었는지는 명확치 않으나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소방활동
금화도감이 설치되기 전에도 궁중화재를 진압하기 위하여 금화조직이 있었으며 금화도감이 설치된 후에는 궁중뿐만 아니라 관아,민가를 구화하기 위한 금화군 제도와, 5가 작통제도가 실시되었으며 지방에서는 자발적으로 의용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세종 5년에 병조(兵曺)에서 궁중화재에 대비하여 금화조건을 만들어 시행하였으며, 공조(工曺)에서는 구화사다리, 저수기, 급수기를 비치하고, 형조(刑曺)에서는 급수하는 일을 맡았다.
세종 19년에 전국 각지에서 흉년으로 인해 도적과 화적이 심하자 각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지혜 있고 근검한 사람을 뽑아서 두목으로 정하고 동리 청장년으로 패를 지어 순경을 돌게 하다 도적과 화재가 있으면 구제하고, 가까운 동리까지 지원활동을 하였는데 이러한 경방조직은 현재의 의용소방대와 흡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방화성 도시계획
 
방화장 : 건물이 서로 연접하여 있어서 한번 불이 나면 피해가 극심하므로 세종 8(1423) 대형화재가 있는 후에는 집과 집 사이에 방화장(방화담)을 쌓도록 나무로 울타리 하는 것을 금하였다.
 
방화용수 : 각 가정에서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식수로 하는 것 외에 방화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행랑은 10간마다, 개인집은 우물 하나씩을 파고, 각 관청에서는 우물 두 개씩을 파서 소방용수로 쓸 수 있도록 하였다.
 
궁중 방화시설 : 궁중건물은 지붕이 높아서 화재가 발생하면 오르기 어렵고 옥상이 위험하여 사다리 등을 비치하고 사방 100미터 이내에는 건축을 금하고 창고는 30미터 이상을 떨어져 짓도록 하여 궁궐화재를 예방하였다.
 
조선후기
고종황제 이후 정치 경제의 기강이 무너지고 외세의 침략이 격화되면서 궁궐화재 등이 특히 많이 발생하였다.
 
갑오개혁 전후
그 이전까지 소방사무는 포도청에서 일시 담당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일본은 포도청을 없애고 한성 5부의 경찰사무를 합쳐 경무청을 설치하였다.
1895년 관제를 개혁하면서 내부에 경찰관계 내국을 신설하였으며 경찰과 소방은 내무 지방국에서 관장토록 하였다. 이때에 만들어진 경무청 처무세칙에서 수화(水火), 소방(消防)은 난파선 및 출화